조민아의 근작들: 느슨하고 유연하며 애틋한 전체

 

조민아의 회화는 ‘다양하고 복잡한 모티프들의 중첩’을 특징으로 한다. 다양한 단편들을 조합하여 전체를 만들어내는 방식이야말로 조민아 회화의 가장 특징적인 양상이다. 예컨대 <혼합된 세계>(2020)에는 많은 이미지 단편들이 뒤섞여 있다. 거기서 나는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고 있는 사람’, ‘쌓여있는 도자기들’, ‘탕후루를 들고 있는 사람’과 ‘머리에 도자기를 올려놓고 있는 사람’, ‘칼로 무를 베는 사는 사람’과 ‘새 머리를 하고 케이크를 들고 있는 사람’. ‘망치와 정으로 새 머리를 조각하는 손’, ‘사과들’, ‘수영장 레일’과 ‘생선 뼈가 보이는 간판’ 같은 것들을 발견한다. 여기에 ‘자로 뭔가를 측정하는 사람’이나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창문 밖을 응시하는 사람’도 추가해야겠다. 물론 아직 미처 언급하지 못한 것들이 남아있다. 이 모두를 전부 열거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단편들을 조합하여 조민아가 얻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일단 조민아의 회화에서 어떤 이야기, 또는 서사를 포착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 이미지들을 순차적으로 연결하여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안소연에 따르면 “조민아의 그림은 어떤 형상들로 꽉 차 있는데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하다. 언뜻 보기에 “장황한 서사가 엮여 있을 것 같은데” 정작 “어디에도 서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사가 아니라면 대체 조민아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답하려면 조민아 회화에 등장하는 개별 이미지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로 4.5m에 달하는 두루마리 형식의 대작 <Beyond Somewhere>(2020)를 보자. 여기에는 누군가가 겹쳐 쌓은 것들이 다수 등장한다. 돌과 벽돌, 도자기, 과일 등을 쌓아 올려 만든 무더기들이 그것이다. 새들이 나뭇가지를 쌓아 올려 만든 둥지도 있다. 우리가 호텔 로비에서 흔히 만나는 광경, 곧 투숙객의 짐가방을 모아놓은 모습도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돌, 벽돌, 도자기, 과일, 가방 같은 것들을 겹쳐 쌓을 때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가? 그것들이 깨지거나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균형을 잘 잡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나는 이것이 조민아가 이미지 단편들을 조합하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작가는 벽돌이나 도자기를 쌓아 올리는 것과 매우 유사한 태도로 개개 이미지들을 조합한다. 즉 특정 서사나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전체 안에서 무너져 내리지 않게끔 잘 쌓아 올리는 식으로 이미지들을 조합한다. 조민아 회화에서 이미지들의 조합을 지탱하는 것은 이야기-서사의 논리가 아니라 사물-이미지들의 역학적, 물리적 관계 같은 것이 아닐까?

호텔 짐보관소의 직원은 짐들의 크기나 형태, 무게 등을 섬세하게 고려하면서 그것들을 하나의 전체 안에 배치한다. 이 경우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은 물론 균형일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는 짐 가운데 일부가 빠져나가고 새로운 짐들이 들어올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는 균형 잡힌 상태를 추구하지만 그 균형은 결코 절대적, 항구적인 균형이 아니라 변화에 열려있는 균형, 잠정적인 균형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민아는 이미지 단편들의 크기와 형태, 지각적 무게 등을 세심하게 고려하면서 그것들을 화면 안에 배치한다. <Beyond Somewhere>에서 벽돌을 쌓아 만든 공간이 현재 ‘건설 중’인 상태에 있는 것처럼 ‘잠정적인 균형’은 형성 과정 중에 있는 균형이다. 조민아의 애니메이션 작업 <빼기, 더하기, 그리고 다시 더하기>(2020)는 있던 것들이 빠져나가고 새로운 것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단편들의 역학적, 물리적 균형이 흔들리고 깨졌다가 다시 복원되는 상태를 상연한다.

그런데 지금 조민아가 추구하는 잠정적인 균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잠시 이 작가의 초기작으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이 작가는 《숙련과 No.How》(2015) 《숙련과 노하우》(2016) 등 초기 전시에 발표한 작품들에서 서커스 풍경, 곧 불안정한 조건 속에서 미끄러지거나 떨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형상화했다. 이러한 작업 경향은 이른바 '자재화된 인간'의 목적을 잃은 노동의 모습을 문제 삼은 《오늘의 기약》展(2017)으로 이어졌다. 당시 조민아는 자기 의지에 따라서 살지 못하고 주어진 외부적 조건에 반응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자신의 화폭에 담았다. 《숙련과 No.How》展에서 유사-선언문의 형태로 발표한 텍스트에서 이 작가는 “위험에 대비하여 최소한의 반경 내에서 움직이고 자신이 쥐고 있는 여러 책임에 대한 균형을 유지한다”고 썼다. 이 텍스트에서 “미끄러지거나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몸에 감각을 자동적으로 습득한다”는 구절은 특히 인상적이다. 2015년에서 2017년 사이에 조민아가 쓴 작가노트를 읽어보면 이 작가는 당시 자신의 회화를 이른바 ‘갑을(지배-종속) 관계’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갑이 정한 규칙이나 틀에 어떻게든 자신을 끼워 맞춰 살아남고자 몸부림치는 을의 모습, 또는 억압적 틀을 벗어나고자 노력하지만 결국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을의 비극적 숙명을 다루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의도와는 달리 이 작가의 초기작품에서는 좀처럼 비극적 정서를 체감할 수 없다. 오히려 이 작품 앞에서 나는 어떤 차분함, 냉랭함을 느낀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 안소연이 언급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한” 느낌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효과는 왜 발생하는가?

2015년 이후의 초기 작업에서 조민아가 ‘노하우’나 ‘숙련’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반복을 통한 노하우의 습득, 즉 숙련 과정은 낯선 것, 이질적인 것들에 적응하는 과정, 그것들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노하우를 지닌 사람은 좀처럼 긴장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확실히 반복은 의미있는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효과, 낯선 것을 익숙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조민아의 초기 작업은 지배-종속 관계를 반영하는 작품이라기보다는 지배-종속 관계에 내포된 긴장이나 갈등의 극복, 해소를 지향한 작업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까? 실제로 어느 시점부터 이 작가는 긴장과 갈등이 해소된 평정 상태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무료한 때>(2018)나 <낙원에서>(2018)에서와 같은 작품을 선보인 2018년 개인전 《소란스러운 적막》을 변화의 기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이후의 근작들에서 조민아는 ‘비껴진 자리(detached position)’로 이동하여 반복과 순환을 통해 모종의 틀이나 시스템, 루틴(routine)이 만들어지고 무너졌다가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틀과 시스템, 루틴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에 외부에서 이질적인 것이 유입되면 금방 위태로운 상태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관리자는 그것을 끊임없이 <굽어보고, 돌아보고>(2020) 해야 한다. 근작들에 등장하는 관찰자의 이미지, 이를테면 계량기를 바라보는 사람이나 측정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또한 깨지고 터진 것들, 삐져나온 것들과 흘러내리는 것들을 수습하는 행위들을 주목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가치는 ‘파괴’나 ‘탈주’가 아니라 ‘적응’ ‘유지’, ‘지속’이다.

조민아의 근작들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조민아의 회화는 부정과 탈주가 아니라 현상 유지와 적응이 훨씬 중요해진 사회적 조건 변화에 대한 예술적 반응이다. 이 작품들은 내게 크고 작은 일렁임과 파동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그때그때의 상황변화에 적절히 대처하는 삶의 태도를 환기한다. 최근 진행한 나와의 인터뷰에서 이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소위 코로나 사태 이후 위축된 개인의 조건에 비유했다. 그것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대처하다 보니 구축된 느슨한 전체”라는 것이다. 그 느슨한 전체는 내게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미묘한 감정의 일렁임을 선사한다. 그 일렁임은 특정 개념으로 좀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정동인데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애틋함’이 가장 근사할 것이다.

 

홍지석(미술비평, 단국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