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CHO Minah ///
오늘의 기약(Pledge of today-2017)
더 나은 미래, 혹은 원하고자 하는 삶의 지향을 위해 노동을 하며 소득을 생성하는 것은 당연한 사회적 활동이다. 일정 시간과 기간, 혹은 평생에 걸쳐 우리는 노동을 하고 있다. 그것의 숭고함에 대해 이야기도 하지만 ‘Working poor’라는 말처럼 반대로 노동의 가치는 떨어지고 있다. 고용의 불안, 치솟는 물가로 인해 쉴 틈 없이 일을 해도 극빈층으로 추락할 수 있는 불안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끊임없이 손과 몸을 움직이며 육체노동을 하는 인물들을 주된 소재로 삼았다. 자본주의가 만연한 상황에서 생겨난 ‘자재화된 인간’의 모습을 보며 느낀 체념의 상태와 목적을 잃은 노동의 모습은 지금 청년들의 상황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이 점은 이전 작업들과 연결된 지점으로 현재의 나와 주변의 경험을 통해 내일을 꿈꿀 수 없는 막연한 현재를 사는 이들에 대한 공감의 정서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내밀한 불안을 느끼며 자신들의 성실과 노력을 애써 쌓아 올리는 방법을 취하며 삶을 살고 있었다. 그 안에서 그래도 어떠한 것은 내가 좀 낫고 덜 힘들고, 혹은 월급을 더 버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하고 반대의 경우는 자기 비하로 귀결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같은 회사에 다니지만 대졸자이기에, 혹은 정규직이기에 분리되는 그룹핑에서 생기는 미묘하고 복합적인 감정들을 심적으로 지니며 서로에게 대립각을 세워 서로를 분리해 나간다. 사회 구성원으로써의 동등한 입장이 아닌 1등 시민과 2등 시민으로 나눠지는 현상에서 개인의 존엄에 대해 나 혹은 우리는 어떻게 의식하고 있는지를 반문하며 작업을 진행했다.
움직이는 다수와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소수가 만들어 내는 현실에서 발생한 아이러니한 사건들이나 상황들을 연상하여 풀어낸 그림이 보편적인 삶의 경험들을 끌어내 각자의 경험을 사유해 볼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듦으로써 자신과 타자, 혹은 사회에 대한 시각을 나누는 바람이 있다.
숙련과 노하우(Skills and knowhow-2016)
2015년에 했던 전시 ‘숙련과 No.How’ 는 위성도시(안양)에 사는 5명의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했다. 갓 30대로 진입한 그들은 개인, 지역, 사회에서 느꼈던 삶을 풀어놓았고 공통적인 감정은 체념의 상태였다. 이전 세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많은 풍요를 누리며 사는 듯 하지만 다수가 착취당하는 사회적 구조와 ‘개천의 용’이 적어지는 계층이 이동이 고착화된 상황 등을 직, 간접적으로 느끼며 수동적이고 안전지향주의가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공유하였다. 여전히 사회는 갖가지 갈등이 만연하고 개인의 무능인지, 사회적 구조의 탓인지 모르는 모호함 속에서 내가 만난 5명의 청년들은 각자도생하며 살아가고 있다.2016년. 인스턴트루프(Instant Roof)에서는 ‘숙련 그리고 Knowhow’라는 제목의 전시를 준비하면서 진화된 사회인이 된 그들을 담고자 하였다. 1년 남짓한 시간이지만 그들은 관계의 균형, 의도적인 회피, 처세 등 다각도의 방면으로 노하우를 체득했을 것이다. 작업에서 표현된 군상들이 취하는 행동과 상황, 그것은 현재 한국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도 많은 부분 닮아있을 것이다.
숙련과 No.How(2015) 작가노트
직장? 안 받아줌. 일? 막막함. 결혼? 돈과 남자가 없음. 연애? 남자가 없음. 돈? 원래 없음. 자동차? 사치. 독립? 불가능. 어느 하나 달성하지 못하고 2015년. 86년생인 나는 30살이 되었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자녀이고, 높은 대학 진학률을 자랑함과 동시에 포기를 배워야 하는 '삼포세대'에 속해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 주거의 독립은 더욱이 쉽지 않은 부분이며 위와 같이 나열한 모든 상황은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불안과 위험의 정서가 만연한 현재 사회에 대한 의문을 하며 같은 나이와 같은 지역에 사는 청년들이 모두 안녕한지 궁금했다.
위성도시에 사는, 30대로 갓 진입한 그들의 인터뷰는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자조적인 유머감각을 유지하며 지역에 대한 기억과 현재, 본인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말했다. 그들의 정서는 일본의 '사토리 세대'를 옮긴 '달관세대'와 많은 부분이 맞닿아있다. 청년들이 가지는 패기나 열정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고 현재 사회 구조에서 최대한 위험을 줄이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인터뷰의 말미에 물었던 '어떤 자세를 취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에서 엿볼 수 있듯 사회 구조에 대한 불만은 분노로 넘어가지 않고 체념의 상태로 전이된 모습이었다. 한 구술자와의 대화 중 한 부분이 지금의 상황을 개선하는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기분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면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채우고 삶의 각성과 동력이 될 만한 것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 감정적으로 정서적으로 서로 연대하며 길을 모색하는 움직임도 중요하고 말이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이성복 시인의 시 구절이 아직도 끝없이 반복되는 느낌이구나.』
Jungle story 2015.03.11~03.17(gallery is.Seoul)
A는 외롭고 불완전했다. 할 수 있는 일의 정도나 양은 한정되어있고, 삶을 일구어내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A는 그의 경제적 이익과 안전한 삶의 보장을 위해 B에 귀속되게 된다. 그것은 자발적 순응이었다. 그 과정으로 B가 짜놓은 공동의 목적을 위한 A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었다. B는 전체의 이익과 목표를 위해 결속하고 때에 따라서는 능률적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A가 B와 함께 할진 몰랐다. 나이가 들거나, 장애가 생기거나, 혹은 여성이기 때문에 생산성이 결여된다고 판단되면 B는 가차없이 A를 다 쓴 소모품처럼 뱉었다. 그런데 버려진 A 역시 B의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B가 제시했던 평균적 삶의 양식과 사고를 지향하고 일탈적인 모습이 남들에게 비칠까 조심스러웠다. 세월이 흘러 한 세대, 두 세대가 건너와도 A는 그 밑에 세대에게 표준적인, 혹은 그 이상의 삶을 살아주길 요구한다. 하지만 그 A+는 그 요구가 벅차다. 세대를 거치며 경쟁은 불가피해졌고, 삶의 방식은 획일화되고 세분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A+에겐 B는 너무 폭력적이었다. 그래서 A+는 B에서 이탈하여 작은 b안으로 들어가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B는 계속 갖가지의 이유로 b를 공격했다. A+는 계속 B에 대해 저항했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99:1의 대립이었다. A+는 당연히 1에 속했다. 애초에 게임이 성립되지 않은 구도였다. A+는 선택에 기로에 섰다. 1에 속할 것인지, 99로 들어가 100이 될 것인지. 그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A+의 주변 사람들은 A+를 별종으로 취급하며 점점 떠나갔다. 결국 A+는 그들의 잣대에 맞춰 자신의 성향과 이상을 감추고 B에 들어가고 만다. 알고 보니 B안에는 A+와 비슷한 사람들이 상당수였지만 다들 겉으로는 다수의 입장과 사고를 표명했다. 어느 날 A+에게 발신자 불명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이 메시지는 B안의 구성원 사이에서 유행처럼 돌고 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B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높은 효율과 생산성을 유지하였다.
Keep Going 2014.04.09~04.15(57th gallery.Seoul)
개인의 자유가 당연한 권리가 된 시대다.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할 자유가 있으며 생활양식 또한 그에 따라 다양해졌다. 그래서 개인의 존엄, 가치가 보다 높아지고 각자 삶에 대해 독립적인 듯이 보인다. 나와 같은 세대들은 역사적 사건을 겪은 적도, 무엇인가를 쟁취하려 성토해본 적 없는 모래알과 같은 각각의 개체이다. 그래서 개인주의라는 것을 감지하기 전에 익숙하게 그 감성과 생활에 녹아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개인만의 이야기가 전부이다.
그런 나, 또한 우리가 사회로 편입되어 집단을 만나게 되고 개인은 어느새 전체주의에 순응하게 된다. 여럿이 모여 그룹을 이루게 되면 그 안에서 그들의 성격이 형성되고 권력관계도 생겨나게 된다. 어느 곳이나 약자와 강자는 있기 마련이고 누리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는 대립적 이어 보이지만 서로가 있기에 각자의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들 속에서 소수의 희생을 조장하기도 하고 다른 집단간의 갈등을 빚어내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소위 사회에서 통용되는 ‘인간답게 사는 것’에는 무수히 많은 조건들이 수반 된다. 그것은 법이나 제도로 규정되어지지 않는 구성원들간의 암묵적인 규범인 것이다. 예를 들면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 학벌, 성별, 심지어 인간관계까지도 다양하고 세분화된 항목들로 개개인을 분류하고 제도하여 줄을 세우는 것이다. 또한 아름다움과 젊음이 절대적인 선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타자로 전락해 기회와 권리를 박탈당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런 기준으로 주류와 비주류, 정상과 비정상, 소수와 다수로 나눠진다. 그래서 그 규칙 밖에 사람들이나 소수에 대한 공격, 차별이 당연한 듯이 자행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잔인한 일이다. 그렇지만 나 또한 그 시각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 또 어떤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그것에 가담하여 사회적 주류가 되고 싶은 욕망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이 아이러니한 것이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 인본주의가 근본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경쟁과 성과주의가 과도해진 신 자유주의 시대로 편입되어 일어나는 인간 소외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전 시대에도 집단내의 권력은 항상 존재해왔다. 어떤 기준인지에 따라 개인은 지배자 또는 피지배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 이 흥미로웠다. 그런 원리가 어디서부터 발생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지만 지금 내 주변을 둘러싼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을 찾아보는 과정으로 작업을 시작했다.